이 글들은 “빛과 소금,” “목회와 신학,” “그말씀”등에 게재되었던 글들을 약간 수정, 보완한 내용입니다.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며 기꺼이 순종하는 일에 도움이 되길 기도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 -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Author
Admin
Date
2017-03-17 18:25
마태복음 11장 28-30절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은 오직 마태복음에만 기록이 되어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너무도 고무적이며 또한 푸근한 말씀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누구든지 다 내게로 오라”고 초대하신다. "수고하고" 라는 표현은 힘든 일을 많이 하거나 땀을 흘리고 난 후에 아주 지쳐있는 상태를 말한다. "무거운 짐진 자"로 번역된 표현은 수동적인 입장에서 마치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의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있는 나귀나 소와 같이 막중한 무게에 짓눌려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짓눌림에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늘 평안과 안식 속에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무언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당대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의 외형적인 준수를 철저하게 더 나아가서 지나치게 강요했다. 거기에다 추가적인 내용들, 즉 자기들이 제정해 놓은 "장로들의 유전"을 가지고 사람들의 자유를 구속하며 그들을 율법의 굴레로 착고를 채워서 영적인 신음 속에 허덕이며 살아가도록 했다. 마태복음 23:4 말씀에 보면,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이라고 주님께서 지적해서 말씀하신다 (참조: 사도행전 15:10).

이토록 율법의 억압 속에 묶여서 살아가고 있던 백성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신선한 자유의 선언을 해주신다. 주님께서는 세리들과 창기들을 향해 이 초대장을 보내신다. 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 자신들에게도 같은 초대의 말씀을 들려주신다. 이는 죄인으로 태어난 우리 모두에게 율법은 굴레로 느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며 우리는 죄악의 굴레와 속박 속에 영원히 신음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영혼의 굴레를 벗겨주시며 갈증을 풀어주는 약속을 선언하고 계시다. 예수님께 나오면 쉼을 얻는다고 약속하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면 된다. 이제 주님께 나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28절에서 주님께 오라는 초청은 29절에서 결국 주님께 와서 배우라는 말씀으로 전환되면서, 그 의미가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되어진다. 주님께 나와 쉼을 얻기 원하는 사람들은 주님께 와서,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워야 한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주님의 짐은 가볍기 때문에, 우리의 멍에 대신 주님의 멍에로, 우리의 짐 대신에 주님의 짐으로 바꿔 메면, 쉼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쉼을 얻는 방법에 대한 주님의 설명이다.

율법과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장로들의 유전 대신에 “예수님의 법“으로 우리에게 쉼을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법이 율법이나 장로들의 유전보다 그 내용 면에서 더욱 가볍다거나, 또 지키기가 더욱 쉽다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산상수훈의 말씀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법의 내용은 지상 최고의 법이며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만 가지고는 지키기가 오히려 불가능한 내용들이다. 주님께 와서 배우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해 주시는 예수님, 마지막 때에 아들로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드러나게 가르쳐 주시는 (히브리서 1:2) 예수님께 와서 그 분의 말씀을 배우며 그 분의 인격을 닮아가라는 명령이신 동시에 초대의 말씀이다.

바로 앞에 있는 25-27절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신다. 이 세 절은 28-30절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의 그 친밀하신 관계와 같이 주님과 그의 제자들과의 관계 역시 친밀한 관계가 된다면 수고와 무거운 짐 대신에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안식을 경험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인격적인 특성을 두가지 말로 요약해서 말씀하신다. 즉, 온유와 겸손이다. 온유와 겸손을 배우지 못하고는 주님의 멍에를 멜 수 없으며,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자신의 멍에와 짐을 짊어지고는 고통 속에 허덕일 수 밖에 없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는 구원의 시발점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보다는 구원의 계속되는 경험적 측면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물론 구원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 영혼은 죄의 사슬에서 풀려나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된다. 그러나 그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또 날마다 주님의 품 안에서 쉼을 누리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것이 그 비결이라고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과의 화평"(로마서 5:1)"의 문턱을 넘어서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강"(빌립보서 4장 8-9절)을 지속적으로 경험해 나가는 과정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많은 성경 학자들은 이 말씀이 예레미야 31:25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한다: “이는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만족케 하며 무릇 슬픈 심령을 상쾌케 하였음이니라.”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하는 점은 바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한 모습으로 소개하고 계시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쉼을 당신께서 친히 우리들에게 약속해 주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새언약을 허락하시는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똑같은 내용이 우리 주 예수님의 입을 통해 메아리 쳐 들려오고 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쉼은 한편으로는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즉,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모든 믿는 자들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되는 사건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은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지금" 내게로 와서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재림 후에 경험하게 될 안식을 지금 앞당겨서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14:15 말씀과 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으며 또 지키면서 살아간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즉, 주님을 깊이 알고 주님께 올바로 배운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가르치신 바들을 지켜나가는 것이 우리를 지치게 만들 정도로 수고를 요하는 것도 아니며, 피곤하게 할 정도로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오히려 진리를 행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기쁨이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며 주님을 닮아가고 있다는 감격의 찬양이 우리의 입술을 떠나지 않게 될 것이다. 결국 주님께서 약속하신 쉼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뵙고 또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인격을 닮아가는 과정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참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장면들이 담겨져 있는 다음 구절들을 묵상해 보자. 요 1:39; 막 1:17; 눅 19:5; 요 11:43; 계 22:17).
facebook twitter goo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