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들은 “빛과 소금,” “목회와 신학,” “그말씀”등에 게재되었던 글들을 약간 수정, 보완한 내용입니다.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며 기꺼이 순종하는 일에 도움이 되길 기도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9절 -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

Author
Admin
Date
2017-03-17 19:11
고린도전서 15장 29절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처하는 한 청년이 있었다. 그에게는 모르는 것이 없고, 어느 경우에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루는 대장간을 방문하게 되었다. 대장장이가 쇠말굽을 가지고 작업을 하다가 아직도 뜨거운 쇠말굽을 톱밥 더미위에 올려 놓았다. 색깔은 까맣게 되었지만 아지고 상당히 뜨거운 상태였다. 이 거만한 청년이 대장간에 들어서서는 톱밥 더미위에 있는 그 쇠말굽을 집어 들었다. 너무나 뜨거워서 집자마자 바로 쇠말굽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체통을 지키기 위해 비명을 참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다. 이 청년의 오만함을 잘 알고 있는 대장장이가 “생각보다 많이 뜨겁지?”라고 물었다. 그러자 자존심과 체면을 굽히기 싫은 이 청년은 “자네가 만든 쇠말굽이 제대로 만들어졌나 확인하는데 뭐 그리 시간 걸릴 게 있나? 다 보고 나서 내 던진거야! 꽤 잘 만들었는데 . . ” 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성경의 모든 말씀들을 바르게 이해하기를 원하지만, 정말 해석하기가 어려운 구절이 있는 것고 사실이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침례/세례를 받느냐“ (고린도전서 15:29). 이 말씀이야말로 성경 말씀 중에 가장 해석이 어려운 말씀이 아닌가 생각된다. 몰몬과 같은 이단에서는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세례를 실행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세례는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모든 믿는 사람은 각기 자기의 믿음에 근거하여 침례/세례를 받게 되어있다 (갈 3:26-27). 하지만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세례라는 표현이 위의 본문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과연 바울은 어떠한 의미로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가? 어떤 학자에 의햐면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거의 200가지에 달한다고 한다. 그 중에 중요한 해석 몇가지를 소개해 본다.

먼저, “죽은 자들을 위하여”의 “위하여”라는 전치사를 “ . . 위에서” 라고 이해함으로 “죽은 자들의 무덤 위에서“ 침례/세례를 받는 것으로 이해하는 학자들이 있다. 히브리서 12:1의 말씀과 같이 허다한 증인들, 즉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먼저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성도들이 목도하는 가운데 침례/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해석이다. 순교의 분위기 속에서 비장한 각오로 침례/세례에 임하는 배경을 상정하는 해석이지만, 실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던 당시에는 핍박의 강도가 순교에까지 이르는 분위기는 아직 아니었었다.

또 다른 견해는 그 때에 침례/세례받는 자들은 자신들이 장차 경험할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염두에 두고 침례/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이해이다. 다시 말해 “죽은 자들을 위하여”라는 표현은 결국 “장래에 죽은 상태에 놓이게 될 자신들의 모습을 마음 속에 그리며“라는 식의 의미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바울이 밝혀서 말하고 있지 않는 내용을 삽입해야 하는 무리가 따르므로 해석의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또 다른 견해는 고린도 지방의 어떤 사람들이 옳지 못하게 죽은 자들을 위해 침례/세례를 받고 있었던 현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그렇게 잘못된 침례/세례 행위를 금하거나 또 이에 대해 전혀 아무런 설명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너무도 이상하다. 더 더군다나 부활과 같이 중요한 가르침을 전하는 마당에 잘못된 침례/세례 행위에 근거하여 부활의 진리성에 대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다는 것은 바울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또 다른 견해는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침례/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어간 성도들을 위해 대신 침례/세례를 받는 행위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보면,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침례/세례의 예식은 거의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침례/세례는 곧바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 성경에 나타난 당시 교회의 관행이었다. 그러기에 부득이하고도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고백과 침례/세례는 동시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바울이 언급할 정도를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침례/세례를 미처 받지 못하고 죽는 일이 발생하기란 너무도 비현실적이다.

또 다른 견해는 죽은 사람의 뜻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세례를 받는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이해이다. 즉, 예를 들어 사랑하는 어머니가 예수님을 믿을 것을 당부하며 돌아가시게 된 경우 나중에 예수님을 믿게 된 아들이 어머니의 유언을 기억하며, 또 그 사랑에 감사하며 침례/세례를 받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전후 맥락 어디에도 이러한 이해를 요구하는 요인은 찾아볼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견해를 더 소개한다면, 죽어간 성도들의 자리를 메꾸기 위해서 새로 믿게 된 성도들이 침례/세례를 받는다는 해석이다. 말하자면 새롭게 그리스도를 믿은 성도들이 새로운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죽어간 성도가 교회를 떠나므로 생겨나게 된 공백을 채운다는 식의 개념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계속 싸워 나가야 하는 모습을 염두에 둔 해석이다.

위에 열거한 모든 견해들은 다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커다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세례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적어도 죽은 자들을 대신하여 받는 침례/세례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며, 현재 교회에서 실행되어져서는 안되는 것임은 분명하다. 이것이 성경적으로 맞는 이해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또는 그 지방에서 행해졌었던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세례”는 그 실상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길이 없다. 고린도 교회와 바울이 함께 알고 있는 그 무엇을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즉 고린도 교회와 바울 사이의 특정한 배경에 대한 정보가 우리에게 충분하지 못하므로, 결정적인 해석이 불가능해 보인다.

필자는 마지막 해석이 절대적으로는 아지니만 그래도 가장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싱거운 결론이 될지 모르겠으나, 고린도전서 15:29의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세례 받는 자”로 번역된 부분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솔직한 답변이 아닌가 생각된다. 후에 다른 고고학적인 자료들이 발견되어서 이 부분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이해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게 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는 위에 열거한 여러 답변들의 강점과 약점을 비교하며 이해해 두는 정도로 아쉬움을 남기면 결론을 지어야 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이러한 결론이 확실한 근거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불분명한 답변을 억지로 주장하는 것보다 더욱 솔직하고 바람직한 자세라고 생각된다. 후에 더 정확하고 확신이 있는 답변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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