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들은 “빛과 소금,” “목회와 신학,” “그말씀”등에 게재되었던 글들을 약간 수정, 보완한 내용입니다.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며 기꺼이 순종하는 일에 도움이 되길 기도합니다.


누가복음 6장 20절 -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Author
Admin
Date
2017-03-17 18:28
누가복음 6장 20절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 .

누가복음 6:20에는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대하게 될 때에 일단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것이다. 널리 알려진 마태복음 5:3절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라는 말씀과 비교해 본다면 그 궁금증이 더욱 커지게 된다. 마태복음의 “심령이”라고 하는 표현이 누가복음에는 빠져 있다.

이러한 차이점과 또 다른 차이점들을 들어서, 마태복음의 말씀은 “산상수훈”으로, 누가복음 6:17-23의 말씀은 “평지설교”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즉, 마태복음의 기록과 누가복음의 기록은 전혀 다른 상황에서 또 다른 시간적인 배경 속에 이루어진 전혀 다른 두 편의 설교 또는 주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이해이다. 이러한 이해를 추구한다고 해도 역시 “심령이”라고 하는 표현의 유무에 의한 의미상의 차이는 설명되어져야 한다.

과연 누가복음에 의하면,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님께서 가르치다는 말인가? 구약 성경의 배경을 보면 “가난하다”라는 표현에 대한 좀 더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구약 성경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물론 일차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적지 않은 경우에, 비유적인 뜻으로 영적인 자세를 묘사하는데에 사용되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시편 86:1은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라는 하나님을 향한 절규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라는 자기 묘사 및 간구가 뒤따르고 있으며, 시편 86편의 나머지 전체를 통해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존하며 도우심을 간구하는 진실한 태도가 잘 그려져 있음을 보게 된다. “궁핍”하다는 표현이 경제적으로 가난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신의 영적인 능력의 고갈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전적으로 무력한 자신의 겸손과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표현인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와 유사한 용례는 시편뿐이 아니라 구약 성경 곳곳에서 발견될 수가 있다.

이와 같은 구약적인 배경에 비추어 볼 때에 결국 마태의 기록이나 누가의 기록이 그 내용 면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보게 된다. 누가복음의 경우, 가난한 자는 구약 성경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경건한 자들을 칭하는 것이다. 누가의 기록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 주고 있다고 한다면, 마태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가 “심령이 가난한 자” 즉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이 파산 상태에 놓여 있음을 고백하는, 즉 솔직하고도 진지한 겸손을 소유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음을 밝혀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공관복음서를 대하다 보면 이와 유사한 경우를 많이 대하게 된다. 즉, 아주 흡사하면서도 또 서로 차이를 보이는 듯한 사건이나 주님의 말씀에 대한 기록들이 적쟎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접하게 될 때에, 혹자는 복음서를 기록한 기자들이 착각을 했거나 사용한 자료들의 부정확성과 차이 때문에 그런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해는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는 신학적인 편견에 의한 것이며, 또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서의 기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오해일 뿐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태복음 12:28)과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가락]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1:20) 의 두 말씀을 비교해 보자. 실제로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겠는가? 마태나 누가 둘 중의 한 사람의 착각이나 실수라고 말할 수 있겠고, 또는 주님께서 두 번에 걸쳐 각기 다른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는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 성령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디모데후서 3:16-17; 베드로후서 1:21) 무시하는 오류에 빠지게 되며, 후자의 경우는 앞뒤의 문맥과 사건의 맥락을 고려해 봤을 때에 적절치 못한 이해임이 분명해진다. 가장 적절한 설명은 주님께서는 누가가 전해주는 내용으로 말씀을 하셨는데, 마태는 “하나님의 손[가락]을 힙입어”라는 표현의 의미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서, 즉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주님께서 일하신 것을 독자들에게 풀어서 기록을 해준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한 이해이다. 이 경우에 성령 하나님께서 각기 누가와 마태에게 역사하셔서 현재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기록하도록 감동을 주신 것으로 이해를 한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기로 하자. 누가복음 14:26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마태복음 10:37에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 . .”로 되어 있다. 이 경우 역시 누가는 쎔어족 (Semitic language)의 관용적인 표현인 “미워한다” 즉 “덜 사랑한다”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한편, 마태복음의 경우는 “미워한다”는 표현의 오해 가능성을 인지한 마태가, “주님을 아비나 어미보다 더 사랑할 수 없다”는 의미로 좀 더 쉽고 이해가 잘 될 수 있도록 풀어서 기록해 주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글로 기록된 복음서들 속에 성령 하나님의 다이내믹한 역사하심이 숨겨져 있음을 보게 된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신학적인 시각과 문학적인 소양, 또한 그들의 개성들을 다 활용하셔서 같은 주제에 대한 다양한 소개 및 보도를 가능하게 해주셨다. 즉, 우리에게 주님의 삶과 가르침과 사역에 대한 복음서를 4편이나 주심으로 해서, 다양한 시각에서 또 더욱 더 화려한 색깔을 가지고 주님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설명을 하며 흑백 TV가 아니라 칼라 TV를 통해, 또 모노가 아니고 스테레오의 음향으로 주님의 사건을 소개해 주고 있는 것이다.

복음서 특히 공관복음서를 대하면서 겉으로 보기에 상충되어 보이는, 또 순서 상의 문제가 있어 보이는 사건과 기록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문제점들에 대한 객관적이고 신빙성이 있는 답변이 존재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실제로 성령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어떠한 측면에서라도, 절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영감성 따라서 성경이 절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신학에 근거해서 성경 내의 모순과 오류를 인정하려는 가르침에 경각심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나의 마음 속에 모순인 것같이 보이는 내용들을 접하게 될 때에 “그저 성경도 틀릴 수 있지” 하는 식의 태도는 성경을 대하는 믿는 사람들의 바른 태도가 아니다. 성경의 절대 무오성을 믿을 뿐아니라, 이해하며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객관적이고도 바른 성경 이해에 노력을 아껴서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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