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들은 “빛과 소금,” “목회와 신학,” “그말씀”등에 게재되었던 글들을 약간 수정, 보완한 내용입니다.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며 기꺼이 순종하는 일에 도움이 되길 기도합니다.


요한일서 3장 6, 9절 - 수퍼 크리스천?

Author
Admin
Date
2017-03-17 19:15
요한일서 3장 6, 9절

수퍼 크리스천?

요한일서를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에 나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게 되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3:6);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요한일서 3:9).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다시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범죄하는 자는 누구나 다 하나님을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한다는 듯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적어도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진실되게 고백을 하면서도, 또 실제로 죄를 짓지 않고 살기 위해 성령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며, 말씀의 능력에 의지하는 진지하고 신실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면서도, 이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의 결핍 때문에 상심하며 고민과 의혹 속에 빠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어떤 분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 말씀이 가르치고 있다고 이해한다. 즉,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단계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면 소위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으며 위의 말씀과 같이, 범죄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결과로, 어떤 사람들은 그 단계에 들어가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들을 사용해서 “수퍼 크리스천”의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애들을 써본다. 그러나 누구도 범죄와 무관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 아무도 없다. 혹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체가 범죄이다. 왜냐하면 바로 같은 요한일서 1:8-10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분명히 사도 요한 자신이 “우리”라는 표현 속에 자신을 포함시키면서 우리 속에 죄의 본성이 남아 있으며(8절), 실제로도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 범죄하며 살아가고 있다(10절)고 말씀하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주장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사도 요한은 경고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1:9의 말씀이 은혜의 선물로 주고 있는 것이다. 죄의 본성을 계속 지니고 살기에, 그래서 또 범죄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백의 특권을 주셨음으로 계속 빛 가운데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셨다. 여기에 죄인인 우리들, 용서받은 죄인인 우리들,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으로 간주되는 죄인들인 우리가 완벽하신 빛의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문이 열려져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그리스도의 지배권이 내 삶 속에 완전히 형성되어지고 있을 때에 우리는 범죄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이해이다. 성경 전체적으로는 맞는 말씀이지만, 현 문맥상, 이것이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아니다. 문제는 그리스도께서는 일단 믿는 자들 안에 영원히 내재하시며 당신의 지배권을 항상 행사하고 계시다. 3:8의 말씀을 보면,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했다”고 말씀한다. 그러기에 이 해석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은 죄를 짓기 때문에 결국은 마귀에게 속한 자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주님의 지배를 받을 때에는 하나님께 속했다가 그렇지 않을 때에는 마귀에게 속한 자로 “영적 호적”을 그리 쉽게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요일 3장 6, 9절의 말씀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6절의 “범죄하지 않는다“는 표현과 9절의 ”죄를 짓지 않는다“는 표현 둘 다 원어인 헬라어로는 현재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즉, 이 표현들은 지금 우리 성경에 있는 그대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또는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쉬지 않고 상습적으로,“ 등의 표현을 첨가해서 번역할 수도 있다. 후자의 번역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나 요한 일서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훨씬 더 적절하며 오해의 소지를 불식시킬 수 있는 번역이다. 헬라어의 현재형은 계속되는 진행의 측면을 깅조할 수가 있다. 만일 사도 요한이 믿는 사람들은 전혀 죄를 질 수 없다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또 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 부분의 말씀을 썼다고 한다면, 헬라어의 부정과거형(Aorist) 라고 하는 시제를 사용했었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 자기의 의도를 분명히 밝힐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은 결코 죄 가운에 머물러서 지속적으로 범죄하며 살아갈 수 없다고 가르쳐 준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외면하며 빛 가운데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적으로 거부할 수는 없다고 말씀한다. 우리의 대언자(요한일서 2:1)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무관한 채로, 상습적으로 죄의 구렁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고 가르쳐 준다. 우리 속에서 책망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자극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전혀 듣지 못한 채, 영적으로 완전히 무감각한 상태에서 마냥 죄 속에 탐닉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신앙 양심이 괴로워지는 아픔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고 말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고백을 의심해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한가지 조심할 것은, 제 삼자의 영적 상태에 대한 우리의 판단과 태도일 것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영적인 상태의 외면적인 괴리에 대해 판단하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혹 우리 주위에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계속 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그들의 영적 회복을 위해 진지하게 기도해 주면서, 기회가 되면, 조심스럽게 그리고 (전적으로) 사랑의 자세를 가지고 이 말씀을 소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 (디모데전서 1:15)로 밝히고 있으며, 로마서 7장에서 지신이 겪는 영적인 갈등과 고민을 토로하고 있기도 하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가운데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아버지께 간구하라고 하셨다. 주님의 재림 때에 우리가 몸의 구속까지(엡 4:30) 경험하는 그 날까지, 범죄의 문제는 계속 우리의 영적 전투의 내용이 될 것이다. 성경에 약속되어 있지 않는, 소위 죄를 짓지 않게 되는 “수퍼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 부질없는 노력에 우리의 정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오직 날마다 시간마다 우리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노출시키며, 날마다 자백을 통햐 발을 씻는(요한복음 13:10) 삶의 태도, 즉 빛 가운데 살아가는 즐거움(요한일서 1:7)이 우리의 확신과 즐거움의 근거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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