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들은 “빛과 소금,” “목회와 신학,” “그말씀”등에 게재되었던 글들을 약간 수정, 보완한 내용입니다.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며 기꺼이 순종하는 일에 도움이 되길 기도합니다.


요한일서 3장 6, 9절 수퍼 크리스천? 요한일서를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에 나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게 되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3:6);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요한일서 3:9).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다시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범죄하는 자는 누구나 다 하나님을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한다는 듯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적어도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진실되게 고백을 하면서도, 또 실제로 죄를 짓지 않고 살기 위해 성령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며, 말씀의 능력에 의지하는 진지하고 신실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면서도, 이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의 결핍 때문에 상심하며 고민과 의혹 속에 빠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어떤 분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 말씀이 가르치고 있다고 이해한다. 즉,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단계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면 소위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으며 위의 말씀과 같이, 범죄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결과로, 어떤 사람들은 그 단계에 들어가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들을 사용해서 “수퍼 크리스천”의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애들을...
Admin 2017.03.17
베드로전서 5장 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1 하나님에 대한 오해들 기도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접근하는 경우가 적쟎이 있는 것 같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 Jr.)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그 대표적인 예로 열거하고 있다. 1) 편리한 호텔 보이: 하나님을 호텔 보이 정도로 생각해 버린다. 즉, 아무 때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전화를 해서 가지고 오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호텔 보이는 내가 듣기 싫은 소리나 바른 소리를 할 자격이 없다. 그저 내 원하는 심부름만 해주면 되는 것이다. 2) 엄하고 무서운 학생 주임 선생님: 한 손에는 기록 장부를 그리고 다른 손에는 회초리를 들고서 엄한 얼굴을 하고는 학생들이 잘못한 것이 없나 하며 눈을 부릅뜨고 찾아 다니는 주임 선생님 같이, 항상 감시의 눈길을 멈추지 않는 분으로 하나님을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가까이 가기가 겁이 난다. 그 분 몰래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까지도 갖는 사람들이 있다. 3. 무정한 과학자: 연구를 많이 하고 실력은 좋지만, 정이 없는 과학자와 같이 유모어도 눈물도 웃음도 없는 매정한 분으로 하나님을 오해하는 경우이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우리의 어려움이나 고통등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분으로 하나님을 오해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다. 4. 깜짝쑈를 펼치는 마술사: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끌기 위해 각종 이적과 기사를 베푸시는 분으로 오해하는 경우이다. 그래서 항상 짜릿짜릿한 무엇이 있어야 만족을 느끼며, 그렇지 않으면 싱거워서 신앙...
Admin 2017.03.17
빌립보서 2장 12절 이루어 나가는 구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 그 삶 속에 감격과 흥분 속에 충만하게 지속되지 못하는 아쉬움에 대해 그레이엄 스크로기(Graham Scroggie) 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절은 경험했지만, 오순절은 경험하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사죄는 경험했지만, 능력은 체험하지 못한 채; 용서는 경험했지만, 교제는 누리지 못하는 채; 출애굽은 했지만 복된 약속의 땅에는 이르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들은 아직도 좌절과 불만족의 광야를 헤매이고 다닌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12에서 “너희 구원을 너희가 이루[어 나가]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우리 믿음의 초석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의 가르침과 겉으로 상충되어 보인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1) “이루어 나간다”라는 단어의 의미; 2) 문맥; 그리고 3)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바로 이해할 때에 얻을 수 있다. 첫 번째로, 여기 구원을 이루라라는 표현은 광산에서 일할 때에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광산에 가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함으로 숨겨져있는 좋은 보석들과 유용한 금속들을 하나씩 하나씩 캐내는 과정을 설명하는 데에 이 표현이 사용되었다. 우리의 영적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구원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많은 보배스러운 것들을 우리 속에 공급하시고 채워 주셨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내재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또한 그리스도의 지혜가 풍부하게 우리 속에 감춰져 있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이 우리 속에 부어져 있다. 그리스도의 인내가,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우리 속에 주어져있다.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Admin 2017.03.17
고린도전서 15장 29절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처하는 한 청년이 있었다. 그에게는 모르는 것이 없고, 어느 경우에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루는 대장간을 방문하게 되었다. 대장장이가 쇠말굽을 가지고 작업을 하다가 아직도 뜨거운 쇠말굽을 톱밥 더미위에 올려 놓았다. 색깔은 까맣게 되었지만 아지고 상당히 뜨거운 상태였다. 이 거만한 청년이 대장간에 들어서서는 톱밥 더미위에 있는 그 쇠말굽을 집어 들었다. 너무나 뜨거워서 집자마자 바로 쇠말굽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체통을 지키기 위해 비명을 참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다. 이 청년의 오만함을 잘 알고 있는 대장장이가 “생각보다 많이 뜨겁지?”라고 물었다. 그러자 자존심과 체면을 굽히기 싫은 이 청년은 “자네가 만든 쇠말굽이 제대로 만들어졌나 확인하는데 뭐 그리 시간 걸릴 게 있나? 다 보고 나서 내 던진거야! 꽤 잘 만들었는데 . . ” 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성경의 모든 말씀들을 바르게 이해하기를 원하지만, 정말 해석하기가 어려운 구절이 있는 것고 사실이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침례/세례를 받느냐“ (고린도전서 15:29). 이 말씀이야말로 성경 말씀 중에 가장 해석이 어려운 말씀이 아닌가 생각된다. 몰몬과 같은 이단에서는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세례를 실행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세례는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모든 믿는 사람은 각기 자기의 믿음에 근거하여 침례/세례를 받게 되어있다 (갈 3:26-27). 하지만 죽은...
Admin 2017.03.17
요한복음 15장 7절 주님께서 주신 백지 수표?! 스스로 꾀가 많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이 하나님께 질문을 드린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백만 년이라는 새월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세요?” 하나님께서는, “백만 년이 나에게는 마치 일 초와 같지”라고 답하신다. 이에, “백억 원이라는 돈이 하나님께는 얼마나 큰 돈으로 느껴지세요?” 라고 질문을 던지면서 숨기고 있는 요구 사항으로 접근해 간다. 하나님께서는, “백억 원이라는 돈도 나에게는 일 원 정도 밖에 안되지”라고 이 사람이 기대했던 바대로 답을 하신다. 이제 이 사람은 흑심을 드러내며, “하나님, 저에게 일 원만 주실 수 있으세요?”라고 대수롭지 아닌 듯이 요청을 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럼, 주고 말고. 일 초만 기다려”라고 답하신다. 기도를 드릴 때에 우리의 마음 가짐에 대한 예화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뭔가를 빼앗아 오려는 듯한 분위기가 기도의 분위기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기도라고 하는 것,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특권 중의 특권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쏟아부으시는 창구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기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쏟아부으시는 창구이다. 그러기에 주님의 은혜를 갈구하는 분들이 가장 많이 암송, 또 애송하는 말씀 중에 하나가 요한복음 15:7 말씀이 아닌가 싶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치 백지 수표를 주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구절이다. “여기 빈 칸에 무엇이든지 원하는 액수를 적어 넣으면, 적어 넣는 만큼 내가 주겠노라“ 식의 이해가 언뜻 가능하게 보인다. 그러나 성경을...
Admin 2017.03.17
요한복음 4:24 신령과 진정으로?! 이미 많은 신자들이 익숙해져 있는 개역한글의 “신령과 진정으로”라는 구절은 공예배 시간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기도 시간에 언급되는 표현이다. 그러나 너무 자주 듣기 때문에 그 의미하는 바를 깊이 음미해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 같다. 또한 그 표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어감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최대한으로 적절하게 전달해주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있다. 개역한글의 “신령과 진정으로“ 라는 표현을 그저 무심코 듣다 보면, ”신령“이라는 표현은 뭔가 좀 ”신비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기분을 같게 해준다. 또 ”진정으로“라는 표현은 ”우리의 정성을 모아,”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정도의 의미를 연상케 한다. 한글 우리말 큰사전 역시 “신령하다“는 “신기하고 영묘하다”는 의미를, “진정으로”는 “거짓이 없는 애틋한 마음으로“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생활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또한 이 구절은 예배에 대한 주님의 직접적인 교훈인 만큼, “신령과 진정으로”라는 구절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먼저 그 문맥을 이해해보자. 요한복음 4장에서 주님께서는 의도를 갖고, 즉 그 영혼을 구원하실 목적을 갖고,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오신다. 주님께서는 우물가의 대화를 통해 접근하시며 결국은 여인의 죄인된 모습을 드러내신다. 이에 대해 수가성 여인은 예배에 대한 나름대로의 신학적인 질문을 통해 수치와 당황으로부터 빠져나가 보려고 한다. 예배의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 결국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찾아오셔서 전달하기 원하시는 메시지라는 사실은 모르는 채 . . . 즉, 주님께서 우리를...
Admin 2017.03.17
누가복음 6장 20절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 . 누가복음 6:20에는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대하게 될 때에 일단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것이다. 널리 알려진 마태복음 5:3절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라는 말씀과 비교해 본다면 그 궁금증이 더욱 커지게 된다. 마태복음의 “심령이”라고 하는 표현이 누가복음에는 빠져 있다. 이러한 차이점과 또 다른 차이점들을 들어서, 마태복음의 말씀은 “산상수훈”으로, 누가복음 6:17-23의 말씀은 “평지설교”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즉, 마태복음의 기록과 누가복음의 기록은 전혀 다른 상황에서 또 다른 시간적인 배경 속에 이루어진 전혀 다른 두 편의 설교 또는 주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이해이다. 이러한 이해를 추구한다고 해도 역시 “심령이”라고 하는 표현의 유무에 의한 의미상의 차이는 설명되어져야 한다. 과연 누가복음에 의하면,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님께서 가르치다는 말인가? 구약 성경의 배경을 보면 “가난하다”라는 표현에 대한 좀 더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구약 성경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물론 일차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적지 않은 경우에, 비유적인 뜻으로 영적인 자세를 묘사하는데에 사용되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시편 86:1은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라는 하나님을 향한 절규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라는 자기 묘사 및 간구가 뒤따르고 있으며, 시편...
Admin 2017.03.17
마태복음 16장 24절 자기 십자가를 지고. . . 고부간의 갈등을 겪고 있는 한 시어머니는 버릇없는 며느리가 자기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고 체념 섞인 어투로 기도회 시간에 넉두리를 한다. 제자 훈련을 열심히 받고 있는 며느리는 자신이 제자로서 지고 가야할 십자가는 바로 자기의 시어머니라고 QT 노트에 적어 놓는다. 쉽게 격분하는 못된 성격이 자신이 지어야 할 십자가라고 "고백"하는 형제가 있는가 하면, 육신의 지병이 자신이 평생 지고 가야할 십자가라고 이해하며 어금니를 꽉 깨무는 자매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다 마태복음 16장 24절을 암송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내용을 기도 제목으로 삼아 열심히 주님 앞에 간구했던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자기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혼동이 있는 듯하다. 십자가는 직접적으로 고난을 연상케 한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고통을 당하셨다. 그러기에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바로 우리가 지어야 할 십자가라고 생각들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죄 때문에 그 대가로 요구되어졌던 십자가의 형벌은 이미 주님께서 완전히 해결해 버리셨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우리가 졌어야 했던 그 십자가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지어주셨다. 그러기에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우리가 져야 할 고통의 십자가는 더 이상 필요하지도 않으며 또 존재하지도 않는다.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가 되기 원하는 사람들을 향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 말씀은 주님께서...
Admin 2017.03.17
마태복음 11장 28-30절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은 오직 마태복음에만 기록이 되어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너무도 고무적이며 또한 푸근한 말씀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누구든지 다 내게로 오라”고 초대하신다. "수고하고" 라는 표현은 힘든 일을 많이 하거나 땀을 흘리고 난 후에 아주 지쳐있는 상태를 말한다. "무거운 짐진 자"로 번역된 표현은 수동적인 입장에서 마치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의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있는 나귀나 소와 같이 막중한 무게에 짓눌려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짓눌림에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늘 평안과 안식 속에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무언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당대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의 외형적인 준수를 철저하게 더 나아가서 지나치게 강요했다. 거기에다 추가적인 내용들, 즉 자기들이 제정해 놓은 "장로들의 유전"을 가지고 사람들의 자유를 구속하며 그들을 율법의 굴레로 착고를 채워서 영적인 신음 속에 허덕이며 살아가도록 했다. 마태복음 23:4 말씀에 보면,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이라고 주님께서 지적해서 말씀하신다 (참조: 사도행전 15:10). 이토록 율법의 억압 속에 묶여서 살아가고 있던 백성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신선한 자유의 선언을 해주신다. 주님께서는 세리들과 창기들을 향해 이 초대장을 보내신다. 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
Admin 2017.03.17
마태복음 6장 13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가운데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라는 이 구절은 기도하면서 수도 없이 되풀이 했었겠지만,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하며 기도했었는가 스스로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은 오해할 여지가 적쟎이 있는 말씀이다. "Lead me not into temptation" 정도로 번역하는 영어 번역본이 많이 있다 (KJV, NIV NASB). 즉“저를 시험으로 인도하지 마옵소서.” 그래서 누구는 “저를 시험으로 인도하지 마옵소서. 인도하지 않으셔도 저 혼자 충분히 찾을 수 있습니다” 라고 농을 하기도 한다. “시험“이라고 하는 표현은 원어로는 ”페이라스모스“인데 어떤 학자들은 이 말씀을 인류 역사의 종말에 나타나게 될 대환란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하는 의미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증거가 아주 약하다. 복음서에 아홉번 사용되지만, 이 단어는 한번도 대환란의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고 있지는 않다. 신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도 스물 한번 사용되지만 문맥상 분명하게 종말 때의 환란을 칭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 한편 종말론적인 뉘앙스가 없이, 일반적으로 “시험”이라는 표현은 부정적인 의미와 긍정적인 의미를 둘 다 가지고 있다. 전자의 경우는 유혹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이다. 즉 사탄이 우리를 공격해오는 것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겠다. 야고보서 1:13-14절에 유혹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연단”이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 있게 된다. 야고보서 1:2, 12 그리고 베드로전서 1:6의 경우에 바로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시험에 들게 하지...
Admin 2017.03.17
N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