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고 구원은 무엇인가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엄연히 계시며 또한 거룩하십니다. 즉 죄를 혐오하십니다. 또한 우리의 경험이 확실하게 증거해 주듯이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 인생의 아픔은 바로 이 사실에 기인합니다. 즉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인생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23). 인생은 지금도 그 무서운 심판의 일부를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심판 앞에 서있는 죄인을 향한 복된 소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따라서 신음하고 있는, 그리고 죽음을 향해 또 더 나아가 영원한 형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살리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할 해결책을 친히 제시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셔서, 죄의 삯으로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능히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실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죄 때문에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능히 대신 죽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예수님은 죽은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그 죽음이 실제로 우리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음을 입증해 보여주셨습니다. 죄의 결과인 죽음을 정복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사망이 우리를 억누르고 지배할 수 없게 해주신 것입니다. 비어있는 예수님의 무덤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의 전적으로 변화된 삶이 부인할 수 없는 부활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으로 찾아들어오셔서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 즉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인생을 제대로 멋지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23).

 

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1) 먼저, 지금까지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또는 하나님께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아온 과거의 잘못 그리고 지은 모든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를 회개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2)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능력의 부활을 통해 보여주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즉 내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원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믿으면 지금 곧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사도행전 3:1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9-10).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죄인의 모습 그대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의 샘물에 죄로 찌든 이 영혼을 담금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온 모든 날과 모든 죄를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제 모든 죄를 정결하게 씻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 부활의 능력으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제게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이 죄인,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고 구원은 무엇인가요? – 좀 더 자세히

  1. 부인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이 있지만, 실제 그 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자기들을 살펴보고 계시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부인하려고 하지만, 억지를 부리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집어 넣으셨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18-20).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도 살인이나 강간이 죄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즉 엄연한 기준이 있다는 사실을, 즉 절대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이 절대 진리는 절대자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우리는 모두 다 죄인입니다. 전과의 경력이 있던 없던,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죄의 본질은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죄입니다. 또한 우리는 태어난 후 얼마 있다가 처음으로 죄를 짓게 되어 그 때부터 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어린 아이도 따로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죄를 짓습니다(에베소서 2:1). 우리 경험을 통해 이미 확실하게 입증된 부인할 수 없는 이 두 가지 사실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즉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죄인으로서 서있다는 사실입니다.

 

  1. 부인할 수 없는 인생의 아픔과 한계

죄인이라는 현실 때문에 우리는 예외없이 모두 죽음을 경험합니다! 원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벽한 환경 가운데에 영원히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요 독립의 선언이었으며 그 결과 인간은 타락을 경험하고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참조: FAQ 09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의미”)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자기를 만들어주신 창조주를, 자기를 “낳아주신” 아버지를 거역하고 독립을 선언한 것입니다. 여기서 인생은 망가졌으며, 이것이 바로 죄의 근원이며 가장 큰 죄입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전반적인 아픔의 뿌리에는 바로 이 죄가 놓여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왜 이 세상이 이렇게도 많은 비극과 불의가 판을 치고 있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절대 진리도 없고, 선과 악의 구별도 상대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그 답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 죄에 있습니다. 하나님 책임이 아니고 우리 책임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께서 우리가 망가뜨려 놓은 것을 고치고 계십니다. 결국은 완벽하게 고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통해서!

 

  1. 부인할 수 없는 사랑의 증거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또한 사랑이십니다. 한편 죄를 혐오하시기 때문에 죄인인 우리를 심판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살려주기 원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딜레마가 놓여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이 마련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참조: FAQ 06 예수 그리스도는 무슨 뜻입니까)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피조 세계 속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죄없으신 예수님께서 죄 때문에 죽어야 할 우리를 위해 대신 형벌을 받고 죽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가 없으십니다(히브리서 4:15). 그러므로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능히 대신” 죽으실 수 있습니다. 또한 완전한 사람이시기 때문에 사람인 나를 대신해서 내 죄의 삯인 죽음을 죽으실 수 있습니다(히브리서 10:5). (참조: FAQ— FAQ 07 어떻게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며 100% 사람일 수 있나요?)

죄의 문제는 내 힘과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미 저지른 죄가 많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많은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죄의 삯을 지불할 수 없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로 죄의 삯으로 “대신 지불”하게 하시고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로마서 5:8; 6:23). (참조: FAQ 08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가 경험하는 죽음과 어떻게 다른가요?)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제가 5살 쯤 되었을 때 사건입니다. 아빠가 제게 집 뜰에서 공을 차지 말라고 하셨으나, 저는 말씀을 어기고 공을 찼고 그 결과 멋지게 유리창 하나를 깨뜨렸습니다. 잔뜩 겁이 났습니다. 아빠가 집에 돌아오시자마자 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제 죄를 아빠에게 고했습니다. 아빠는 제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리창은 새로 갈아끼워야만 했습니다. 저에게 돈을 벌어와서 유리창을 갈아 끼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빠가 돈을 “대신 지불”하고 유리창을 갈아 끼우셨습니다. 저는 유리창을 깨뜨리기만 했지, 갈아 끼울 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5살 짜리 소년은 “아빠, 내가 돈 벌어서 갈아 끼울께요”라고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아빠가 해결하셨습니다. 눈물로 범벅된 “아빠, 잘못했어요”가 아들을 향한 아빠의 사랑을 확인해주었습니다. 용서가 있었으며 회복이 있었습니다. 

 

  1. 부인할 수 없는 부활의 증거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친히 여러 번 예언하신대로 죽음을 정복하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마가복음 8:31; 9:31; 10;34). 중요한 사실은 죽음과 부활을 미리 예고하셨다는 점입니다. 또한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목숨을 내어주면서까지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직접 목격한 부활의 소식을 신약 성경에 기록해서 오늘까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부활의 사실은 수많은 역사적인 증거를 동반하고 있습니다. 부활 사건은 죄의 결과인 죽음을 죽인 사건입니다. 인류 역사에 새로운 소망을 밝힌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사랑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부활하신 사실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로마서 10:9-10).

 

  1. 부인할 수 없는 논리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은혜란 자격이 없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거저 받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장 값비싼 대가, 온 우주보다 더 큰 대가를 지불하시고,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값을 치루셨기 때문에 우리가 더 추가해서 지불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완벽하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내가 한 몫을 담당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착한 행실을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칩니다. 만일 착한 행위로 구원이 가능하다면 종교 자체가 필요없지 않습니까? 무슨 또 누구의 도움이 필요하겠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구원은 우리의 노력과 선행을 통해서는 전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종교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선행을 통해 구원받을 자가 없음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갈라디아서 2:16). 이 가르침은 성경을 종교와 구별시키며 또한 종교가 진리가 아님을 밝혀줍니다. 아무리 많은 선행을 해도, 악행을 동시에 저지르는 우리는 소위 정돈된 삶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빈 손 들고 앞에서 십자가를 붙드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의 샘물에 우리 영혼을 담금으로 우리는 정결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의 부활을 힘입어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참여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죄인의 모습 그대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의 샘물에 죄로 찌든 이 영혼을 담금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온 모든 날과 모든 죄를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제 모든 죄를 정결하게 씻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 부활의 능력으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제게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이 죄인,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관련 성경 말씀

로마서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에베소서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히브리서 4: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10: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마가복음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하나님을 믿으면 되지 예수님을 꼭 믿어야 하나요?

먼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지만, 죄인의 모습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는 현실이 문제가 됩니다.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자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실상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가 바로 이와 같이 사람의 방식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만 가능하며, 성경은 그 방법을 가르쳐주며 또한 그 방법으로 초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여기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방법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동물의 제사를 통해 죄를 씻는 방법을 통해 하나님께로의 접근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오실 구원자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로 오셔서 친히 당신의 몸을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더 이상 황소나 염소의 피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단번에 드린 제사를 통해 친히 우리를 위한 큰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히브리서 9:13-1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곧 길이요, 즉 진리이며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서울로 가는 길은 많이 있지만,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진리는 정의상 배타적입니다. 모든 거짓과 잘못된 방법들로부터 구별됩니다. 사람들이 고안해 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방법으로만, 하나님께로의 접근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믿지만 예수님을 거부하는 분들은 이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요한복음 5:23).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배타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자비와 사랑으로 가득 찬 그리고 전적으로 인격적이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든 가르침과 삶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이 배타적인 선언의 의미를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그저 의미없는 독단인가 아니면 타협할 수 없는, 순종해야하는 진리인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원한다면,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주실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거룩한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소를 향해 감히 나아갈 수 없는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브리서 10:19-20).

 

관련 성경 말씀

히브리서 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교회당을 가지 않아도 하나님만 사랑하면 상관없는 것 아닌가요?

교회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사람들 전체를 지칭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계획을 따라(마태복음 16:18)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이 땅에 태동되었습니다. 지역적으로는 예루살렘에 지역교회가 처음 생긴 것입니다. 그 이후 시대와 지역에 따라 수많은 지역 교회(local church)가 존재해오고 있습니다. 교회당을 간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함께 예배드리며 영적인 교제를 나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겠죠. 달리 표현하면 지역교회의 한 지체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구원의 본질적인 목적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구원의 목적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려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목적이라면 구원받은 사람들은 곧바로 하늘나라로 가야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 난 후에도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 이 땅에 계속해서 살며 교회에 주신 사명을 수행해 나가도록 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모여서 예배드리고, 말씀을 배우고, 서로 사랑을 나누고, 다른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사도행전 2:42-47). 이러한 교회의 기능을 개인적으로는 성취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 전에 먼저 하늘나라로 부르실 때까지, 서로를 섬기며(로마서 12:5),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함께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엡 2:21-22). 그리고 생명의 복음을 힘을 합하여 함께 전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고전 11:26).

교회당에 가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의 삶을 살 수 없으며, 하나님을 바르게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요일 4:21), 교회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며 그 사랑을 교회 밖으로 흘러넘치게 함으로써 예수님 모르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도 교회의 지체가 되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다른 영혼들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특권이며 개개 신자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은 그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 땅에 완벽한 지역 교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모습을 추구하는 교회는 많이 있습니다. 더욱 모이기를 힘쓸 것을 성경은 격려합니다(히 10:25). 성경적이지 못한 지역 교회로부터 받은 실망 때문에 성경적인 지역 교회마저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경험했던 실망스런 모습을 오히려 경계하고 또 고치며 성경적인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에 내가 앞장 서야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으로 품고, 교회를 더욱 강건하게 세워나가는 일에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지역 교회의 한 지체가 되어 각기 사명을 담당해야 합니다. 과거의 실망이 핑계가 아니라 새로운 의욕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자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것입니다.

 

관련 성경 구절

마태복음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사도행전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사도행전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로마서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고전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요일 4: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10:25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침례를 꼭 받아야 하나요?

  1. 침례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침례는 예수님의 명령이라는 가르침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8-20).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복음을 전해 예수님을 믿게 하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을 의미합니다. “침례”는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이 제자로서 첫번째 순종해야 될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는 믿는 자가 제자로서 내딛는 첫 번째 공식적인 순종의 발걸음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배우며 “지키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1. 침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십자가 상의 강도는 침례를 받지 않고/못하고 곧 바로 주님과 함께 주님 계시는 낙원으로 갔습니다(누가복음 23:40-43). 구원의 조건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그리스를 믿는 것 이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없습니다(에베소서 2:8-10; 갈라디아서 2:21). 막차를 타게 된 이 강도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 기회가 없었습니다. 가정을 해서 만일 이 강도가 풀려났다고 한다면, 주님의 명령에 따라 침례를 받고 제자로서 멋진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1. 침례는 구원받은 사실에 대한 간증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3-4에서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이 경험한 성령 침례에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합하여”/함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을 경험했습니다. “합하여”라는 원문의 표현을 직역하면, “속으로”가 됩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 속으로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물침례는 바로 이 사건을 예식을 통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포하며 간증하는 예식입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성령 침례를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이 성령 침례를 받은 사실을 물침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사도행전 10:47; 고린도전서 12:13)(참조: 그리스도인은 성령 침례를 꼭 받아야 하나요?).  

그러므로 침례를 받을 수 있는 자격 조건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현실 이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어느 정도 믿음이 자라고 또 내 삶도 어느 정도 믿는 사람답게 정돈이 된 후에 침례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믿은 직후 침례를 받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사도행전 2:41; 8:36). 또한 예수님의 명령 역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

구원이(또는 성령 침례가) 물침례의 조건이지 물침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침례는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의 자랑스런 선포이며 감사의 간증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영혼이 물침례 받기를 피하는 것은 그 선포와 간증을 피하는 것이며, 이는 참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경우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됩니다. 침례는 그리스도를 믿게 된 자가 제자로서 내딛는 첫 번째 공식적인 순종의 발걸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도가 핍박을 받던 때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사실을 공포하며 간증하기 위해 강가와 같은 곳에서 침례를 받다가 발각되어 순교하기도 했습니다. 침례 예식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자랑스러운 선포의 시간이며 감사가 가득찬 그리고 영광스런 예식입니다: “죄인이었던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영광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관련 성경 말씀

 누가복음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로마서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행전 10: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침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2: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사도행전 8: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는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의 “메시야”의 헬라어 표현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선지자(열왕기상 19:16), 제사장(출애굽기 30:30) 그리고 왕(사무엘상 10:1)이 기름부음을 받고 그 직책을 수행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 우리를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계시를 완성하는 선지자의 역할을 하셨습니다(히브리서 1:1-2; 신명기 18:15; 요 15:15), 또한 당신의 몸을 단번에 영원한 제사로 드림으로 큰 대제사장의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히브리서 9:12; 7:25-26). 그리고 재림을 통해 왕으로 우리를 다시 찾아오실 것입니다(이사야 9:7; 요한복음 12:13; 요한계시록 19:15).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부활/승천을 통해 이 세 직분의 의미와 기능을 궁극적으로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더 이상 복수로 사용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칭하는 표현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구약 성경의 “여호수아”와 같은 표현으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구약에 오시기로 예언된 메시야/그리스도의 고유의 이름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마리아에게 처음 계시되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태복음 1:21).

“그리스도”는 직함이고 “예수”는 개인적인 이름입니다. 즉 “사도”가 직함이고 “바울”이 그의 개인적인 이름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이후 “예수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주님이신 분을 칭하는 표현으로 같이 묶여져 사용되어 오고 있습니다.

 

관련 성경 말씀

열왕기상 19: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출애굽기 30:30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발라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그들이 네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고

사무엘상 10:1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히브리서 1: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신명기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이사야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요한복음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요한계시록 19: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요한계시록 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어떻게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며 100% 사람일 수 있나요?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이는 우리 경험 가운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입니다. (삼위일체의 가르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존재 양식입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입니다: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로고스]”는 요한복음이 쓰여지던 당시에 지배적이였던 헬라 철학에서 온 우주 간에 통하는 최고의 영적 진리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플라톤을 위시한 헬라 철학자들은 육신을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선언이야말로 파격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영원한 존재가 제한적인 육신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찾을 수 없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는 부활 사건보다 더 엄청난 사건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사건의 메카니즘을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존재 영역 밖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후에 하늘 나라에 가게 되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방법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목적과 의미는 성경 말씀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한복음 1:18). 아무도 보지 못한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즉 계시자로 오셨습니다. 또한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계시의 절정이시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의 죄의 삯을 지불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브리서 10:5). 정확한 죄의 삯을 대신 지불하기 위해, 사람의 죽음을 대신 죽기 위해 성자 하나님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동시에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사람이십니다. 50% 하나님, 50% 사람이 합쳐져서 100%가 아닙니다. 100% 하나님이시며 100% 사람이십니다. 영어로는 God and Man이 아니라 God-Man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에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효력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 다음 두 설교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14(1)    성육신 사건: 그 신비에 눈을 뜹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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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4(2)    성육신 사건: 그 영광을 보고 선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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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죽음은 우리가 경험하는 죽음과 어떻게 다른가요?

모든 사람은 자기 죄 때문에 죽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육신의 죽음을 경험하고 후에 생명의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육신의 죽음을 경험하고 후에 심판의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요한복음 5:28-29; 히브리서 9:27). 두 경우 모두 육신의 죽음은 우리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히브리서 4:15)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죽음입니다. 따라서 우리 죄인의 죽음과는 그 본질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이미 창세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습니다(에베소서 1:3-5), 또한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이사야 53:10); “But the LORD was pleased To crush Him, putting [Him] to grief;”(NASB/KJV); “Yet it was the LORD’S will to crush him and cause him to suffer;(NIV/ NRSV)].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한복음 10:17-18).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에 대해 전적인 주도권을 쥐고 계셨습니다.
4복음서는 예외없이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마지막 장면을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개역개정 번역은 헬라어 원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지 못합니다. 헬라어 원문을 근거로 영어 번역과 함께 설명을 합니다. 마태복음 27:50의 기록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개역개정). 여기 주어는 “영혼”이 아니라 “예수께서”입니다. “영혼”은 “버리다”는 동사의 목적어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당신의 영혼을 버리셨다”가 정확한 번역입니다 [“and yielded up [His] spirit”(NASB, NKJV); “he gave up his spirit”(NIV)].
요한복음 19:30의 기록입니다: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개역개정). 여기 역시 주어는 “영혼”이 아니라 “예수께서”이며, “영혼”은 “건내주다, 내던지다”는 동사의 목적어입니다. 따라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고 자기 영혼을 건내주셨다/내던지셨다”가 정확한 번역입니다 [“and gave up His spirit” (NAS, NIV, NKJV, NRSV)].
마가복음 15: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개역개정)과 누가복음 23:46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개역개정)의 기록은 같습니다. 이 문장은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입니다. 직역을 하면 그리고 정확한 번역은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마가)/ 이 말씀을 하신 후(누가) 마지막 숨을 내쉬셨다”입니다 [“and breathed His last”(NAS, NIV, NKJV, NRSV].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고난받으사 십자가에 죽으신”(사도신경)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계획에 따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원하셔서 죽으신 것입니다. 힘이 모자라 빌라도의 권력에 의해 잡히고 죽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또한 주도권을 쥐시고 십자가를 향해 가셨습니다(마태복음 26:53-54; 요한복음 19:10-11). 모든 사람의 죽음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생명을 빼앗기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 독특했습니다. 죄없으신 분의 죽음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진, 죄의 삯을 지불하기 위해 모든 고통을 다 감당한, 모든 것을 “다 이루신”(요한복음 19:30)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을 죽인 죽음이었습니다. 할렐루야!

관련 성경 말씀

요한복음 5: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마태복음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요한복음 19:10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 다음 설교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0:17-18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그 독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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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의미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5-17)

왜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세워놓고는 그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이 우리에게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도 아담과 하와같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영적인 타락 속에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사탄은 오늘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비집고 끼어 들어와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유혹합니다. 선악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어떠냐고 물어옵니다. 선악과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혹, 선악과는 하나님의 심술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혹,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속에 빠지도록 유혹하기해 사용하신 도구였다고 생각하십니까? 혹,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을 윽박지르는 공갈 협박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식의 생각은 거짓으로 가득 찬 사탄의 설득입니다.

하나님은 “먹나 먹지 않나 어디 한번 보자”하며 심술부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완벽하게 선하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분이 아니시며, 오히려

진리를 가르치며 인도해주시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우리를 윽박지르거나, 위협하는 분이 아니시며,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입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임의로 먹”게 해주셨습니다. 동산의 모든 관리권을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각종” 그리고  “임의로” 즉 제한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금하심으로써, 아담은 주인이 아닌 청지기/매니저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무를 “동산 중앙에”(창세기 3:3) 놓으심으로 수시로 지나다니며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배려입니다.

피조물을 창조주와의 관계를 바로 유지할 때 최대의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에덴 동산의 지배권, 통치권을 위임해주셨습니다. 이 위임의 사실을 기억하라고 하나의 금지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우리가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살아가는 인생이 최선의 인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생을 풍요롭게,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주어진 인생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시며 나는 그 분의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와 그 질서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나는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 아래 주어진 인생을 마음껏 즐기며 구가할 수 있습니다. 그 관계를 파괴시킬 때에 나는 삶 속에 진리의 등불을 꺼버리며 어두움의 계곡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은 오히려 나를 부자유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피조물의 완벽한 자유는 그 창조주 품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바로 이 질서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은혜의 방편이었습니다.

 

관련 성경 구절

로마서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리스도인은 성령 침례를 꼭 받아야 하나요?

아뇨, 이미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성령 침례를 받았습니다.

침례자 요한은 메시야/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성령 침례를 베푸실 것을 예언합니다(마태복음 3:11; 마가복음 1:8; 누가복음 3:16; 요한복음 1:33).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승천을 앞두시고 이 사실을 확인해주십니다: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사도행전 1:5). 그리고 예수님 승천 후 열흘이 지난 오순절 날 성령님께서 강림하십니다(사도행전 2장).

초대 교인들은 오순절 날 성령 강림과 함께 성령 침례를 동시에 경험했습니다. 후에 사도 베드로는 이것이 성령 침례의 첫번 경우라고 설명합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사도행전 11:15-16). 동시에 이 말씀은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와 그의 가족이 예수님을 믿는 순간 성령 침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은 사람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성령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됩니다. (성령 강림을 통해 교회가 태동되었습니다.) 그 이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고넬료와 같이 바로 믿는 그 순간 성령 침례를 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3에서 성령 침례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성령 침례의 결과는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신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성령을 마시는” 것, 즉 같은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하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령 침례를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곧 그가 교회의 지체가 아니라는 뜻이 되지 않겠습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순간 성령 침례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 침례는 구원의 한 측면을 의미합니다. 구원과 성령 침례를 따로 떼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에베소서 4:5은 말씀합니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여기의 침례는 물침례가 아니라 성령 침례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순간 성령 침례를 받게 되며, 성령님의 내재하심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성령 침례는 구원받고 난 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난 후에” 경험하는 소위 말하는 “second blessing”이 아닙니다. 다음 단계로의 영적 도약도 아닙니니다. 구원의 시발점에서 받는 은혜입니다. 성령 침례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해주며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게 해줍니다(로마서 6:3-4). 또한 성령 침례는 신자들을 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묶어줍니다(에베소서4:3). 그 무리 안에 성령님께서 역동적으로 일하시며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꾸며 나가십니다.

이를 위해 성령 충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령 충만을 받을 것을,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으며 살아갈 것을 명령합니다(에베소서 5:18). 성령님의 역동적인 역사하심을 힙입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성령 충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 명령과 성령 침례를 혼동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관련 성경 말씀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푸실 것이요 [참고: 마가복음 1:8, 누가복음 3:16, 요한복음 1:33]

로마서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

 

침례와 세례는 어떻게 다른가요?

세례는 손에 물을 적셔 세례받는 자의 머리 위에 뿌리는 양식이며, 침례(침수 예식)는 물 속에 온 몸을 담그며 받는 양식입니다. 침례는 물에 “담근다”는 기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헬라어 원어의 “밥티죠”의 번역이며 세례는 영어 sprinkle의 번역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sprinkle이라는 의미를 지닌 헬라어로 침례 예식을 표현한 경우는 한번도 없습니다.

신약 성경의 모든 경우 침수 예식을 행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요단 강 “물 속에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마태복음 3;16). 3천명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에 그 많은 사람들을 침례 줄 만한 물이 있었겠느냐고 질문할 수 있겠으나, 예루살렘 안에는 충분히 많은 못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에디오피아 내시는 마차에서 빌립의 전도를 통해 예수님을 믿고는, 침례받기를 원했습니다: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8:36). 세례를 받으려 했다면 마차에 있던 식수로 가능했을 것입니다. 빌립보 간수의 경우 역시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밤 중에 집에 있던 물탱크 등 침수 예식을 행할 충분한 물이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는 가까운 연못에서 침례를 받았을 것입니다(사도행전 16:33).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도 스스로 행하는 침례 예식이었만 물 속으로 들어가 예식을 행했습니다.)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실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예식입니다. (참조: FAQ 05 침례를 꼭 받아야 하나요?) 침수 예식의 방법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지낸 바 된 사실을 가장 잘 묘사해줍니다. 성령 강림 후 200년 이상 지난 후, 시프리안(Cyprian)이 아픈 사람들을 위해 세례를 허락했습니다. 칼빈도 초대교회에서 침례만을 행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기독교강요, 4:15:19).

성경적인 침수 예식의 양식은 침례입니다. 침례는 결코 침례를 행하는 교회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모든 교회의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 의미를 바르게 알고 세례받은 분들의 세례가 무효하다고 말씀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지 않은 상태에서 받은 침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세례는 가장 좋게 말해서 약식입니다. 침례는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사건 즉 예수님을 믿고 새 생명을 얻게 된 사건을 표현하는 예식입니다. 그러니 가장 멋있게 또 성경에서 보여주는 양식으로 예식을 행하고 싶습니다. 마치 결혼식 때에 신부들이 멋진 드레스를 준비하듯이!

 

관련 성경 말씀

마태복음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사도행전 16:33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주고 자기와 온 가족이 다 침례를 받은 후

방언을 하지 못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데 사실인가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지 않은 내용을 가르치는 것은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거나 묘한 방법을 통해 뭔가 신비스러운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영혼을 현혹시키는 위험한 사역은 절대로 피해야 할 대상입니다. 이 질문은 결국 방언이 구원의 증거인가라는 질문과 의미가 같습니다. 즉 구원받은 사람은 모두 방언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는 복음주의 신학자들 사이에, 오늘날 은사로서의 방언의 유무에 대한 의견이 나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방언이 오늘날 있다고 하더라도 방언은 결코 구원의 증거가 아닙니다. 은사는 성령님께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뜻대로 각사람에게 나눠주십니다(고린도전서 12:11). 그러므로 모든 신자가 다 방언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럴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30에서 이 사실을 아주 명쾌하게 말씀합니다: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를 볼 때, 고린도교회를 위시해서 교회 안에 방언의 은사가 남용됨으로 영적 교만이 조장되고 교회에 아픔을 가져온 경우가 많이 있어왔습니다. 혹 방언 은사에 관한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에게는 사도 바울과 같이 “더욱 더 큰 은사를 사모”할 것을 권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은사입니다.

 

관련 성경 말씀

고린도전서 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